웬만한 덱 하나와 맞먹는 가격을 지닌 전용서적입니다. 책자는 올컬러로 되어있고 그림과 사진자료에 비해 글이 많은 편이며, 카드 그림들은 4x7cm 크기로 작게 실려있어요. 상징물을 자세하게 알아보는 데는 무리가 있으나 내용을 이해하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RWS의 보편적인 체계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면 다른 파생덱들도 저절로 꿰뚫게 되는 면이 있는데, 반대로 어떤 특정한 덱의 세부사항을 통해 RWS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도 합니다. 보헤미안 고딕 타로는 흔히 '고딕 문학'이라고 부르는 고전적 호러 소설에 뿌리를 두고 구성된, 서늘하고 어두운 타로입니다.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도는 창백한 색조로 이루어져 있고 붉은색이 강조된 카드는 섬뜩할 만큼 불길해보이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우아한 아름다움도 잊지 않습니다. 제작자들이 같은 회사의 '빅토리안 로맨틱 타로'를 만들면서 이 덱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그쪽이 부드럽고 서정적이라면 고딕은 어두운 동반자인 '다크 시스터'에 가깝다고 하네요. 초반부터 이런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가득합니다.

책은 제 기대보다도 자세하고 친절해요. 고딕풍을 좋아하는 마니아든, 그저 그림이며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구매한 사람들이든 덱을 200% 활용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게 느껴집니다. 많은 덱을 모으는 수집가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로카드를 산 초보자도 책에서 많은 걸 얻어갈 수 있을 거예요. 각 카드에 대한 해설은 키워드+그림 설명+상징, 의미, 해석+카드를 다각도로 바라보게 해주는 제안+카드 그림의 원본이 되는 자료+수많은 참고문헌에서 발췌한 인용문들로 짜여져 있습니다. 키워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전통적이고 일반적인 RWS 의미가 먼저 등장하고 고딕이라는 주요 테마가 충실하게 반영된 dark+hidden 키워드가 뒤따라옵니다. 전체적으로는 RWS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되 상당한 변형을 가해 개성적으로 만들어진 카드(예를 들어 완즈 4)도 꽤 있기 때문에 보헤미안 고딕 타로를 잘 알고 싶은 분들께 이 해설서는 필수라고 생각해요. 거꾸로 이 덱을 통해 모호하고 알쏭달쏭했던 RWS 카드들에 대한 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다른 모든 전용서적들처럼 타로의 역사 - 리딩과 스프레드에 관한 예시 - 메이저와 마이너 핍과 코트 카드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 역시 빼먹지 않았고요.

모든 카드의 분량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어떤 카드라도 부실하게 대충 다루고 넘어가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너무 뜬구름잡듯이 쓰여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거나 모든 상황을 다 서술하려다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타로책들 속에서 이만큼 균형감각을 갖춘 서적은 드물지 않을까요. 가장 인기가 많아서 해설서 표지로도 채택된 '힘', 성격상 고딕 장르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지만 무척 아름답게 그려진 '절제', 타로에서 가장 신비롭고 고딕적이라고 할 만한 '달', 빛이 강해서 모든 게 분명해 보일수록 도리어 위험해지는 '태양', 역시 사랑스러워서 더 위험한 물의 정령 로렐라이를 그린 '컵 퀸', 왕관을 쓴 두개골로 묘사되어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사람보다도 먼저 보이는 '펜타클 킹' 카드 해설들이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긴 시간을 쏟아부어 장인정신으로 덱을 만드는 회사답게 마이너 핍과 코트 카드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습니다. 완즈 2와 3, 여제와 황제(논리가 없는 감정이든 감정이 없는 논리든 모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한 쌍)처럼 비교/대조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카드들에 대한 조언이 참 유용해요. 비슷하게 그려져서 함께 보면 좋은 카드들도 짚어줍니다. 가령 '달'과 '소드 5'는 늑대를 거느린 여성/늑대인간 옆에 있는 여성이 주인공이고, '은둔자'와 '정의'는 둘 다 고독한 인물들이지요.

그리고 고딕이라는, 친숙하면서도 사실 잘 모르는 장르에 몰입을 돕기 위한 배경지식에도 소홀하지 않아요. 오래된 공포소설과 관련된 거의 모든 소재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챕터가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골렘, 귀신 들린 유령의 집(Haunted House) 혹은 비밀스러운 저택, 프랑켄슈타인, 미스터리, 광기, 어두운 망상, 덱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달'과 '죽음'과 '유령'에 대한 이미지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 에드거 앨런 포를 필두로 한 소설가들과 주요 작품들, 21세기에 보면 지극히 인종차별스러운 '외국/외국인'에 대한 서양의 무지와 오해까지. 가벼운 교양서적으로 읽어도 좋을 정도였어요. 대강 억지로 끼워맞추기 위해 끌어온 주제가 아니라 정말 타로와 고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심혈을 기울여 그리고 만들고 썼구나 하는 실감이 납니다. 사족이지만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더운 날씨에 읽으면 저절로 온도가 내려가는 기분이라 그것도 좋았네요ㅋㅋㅋㅋㅋ

매직 리얼리스트 사의 덱들이 얼마나 고가인지 알고 있어서 제가 좋았다는 이유로 책을 추천해도 되는지 좀 고민스럽습니다. 책 가격 또한 가볍지 않아서 더 조심스러워요. 하지만 보헤미안 고딕 타로를 좋아하시는 분, 고딕 예술에 관심이 있는 분, 특정한 테마를 잘 다룬 덱과 그 해설이 궁금한 분께는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어요. 책에 카드 이름이 잘못 적히는 등의 작은 실수와 오류들이 있기도 하고... 취향을 많이 탈 것 같기도 하지만, 적어도 저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어요. 단점은 말하고 싶지 않고, 장점은 수고스럽게 떠들고 싶은 책입니다.